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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화되지 못한 女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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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이재 댓글 10건 조회 1,203회 작성일 05-05-25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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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이 꽃이라면 계절 없이 피어도 좋으리라.*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있는 듯한 글 한 줄이 번쩍 떠올라 메모하려고
가방을 뒤적여 연필을 찾았는데 연필심이 부러져 쓸 수가 없었다.
 
 입 안에서 뱅뱅 돌 때 적어놓아여지 그 때를 놓치면 다시는 같은 글귀가 떠오르지 않아
퍽 아쉬워한 적이 종종 있다 보니 나에게 필통과 몇 개의 필기구는 이제 필수품이 되었다.

 그렇다고 메모가 습관화 된 것은 전혀 아니다. 그저 마음이 내켜 쓰여지면
끄적거려 놓았다가  잊혀지면 그만이고 시간이 지나 우연히 다시 보았을 때
내가 써 놓은 낙서가 분명한데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을 때도 많다.

 잠자리에 들었는데 잠은 쉬이 오지 않고 헛도는 생각들의 파장이
산만하게 흐트러졌다가 마음에 쏙 드는 문장이 천장에 쓰여지는 순간이 있다.

 그것을 바로 메모하고 싶은 마음에 눈을 뜨려 하지만 피곤에 지쳐
눈꺼풀이 뜨여지지 않을 때, '아침에 쓰자' 결정을 해버린 다음날 아침은
틀림없이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동반하여 속을 끓이곤 한다.

 미련스런 걸 보면 지식에 대한 열등감은 아닐는지.
못난 습성과 억제되지 못하는 감정의 대부분이 이 열등감에서 나오는 걸 보면
어불성설은 아닌 것 같다.

 주체성이 정립되고 이성이 감정과의 대립에 승리를 한다면 주어진 팔자에도
조금은 변화가 있지 않을까?
아무튼 곁가지가 더 뻗쳐나 뿌리가 뽑히기 전에 마무리를 해야겠기에
다 닳아 희미해진 볼펜으로 눈앞에 보이는 신문을 들어 귀퉁이에 적는 걸 성공했다.
그 때, 연필을 한 번 써보고 싶다는 강한 욕구가 생겨 면도칼을 찾았으나 있을 리 만무하다.

 아이들이 어렸을 땐 연필깎기가 있어 편리했었는데 이젠 그마저도 다 자라
쓰기 쉬운 볼펜을 쓰니 어차피 칼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고 마음먹었을 때
깎아놓아야겠다 싶어 다용도로 쓰이는 작은 칼을 찾아냈다.

 각진 연필을 조심스레 돌려가며 익숙한 솜씨(?)로 깎다가 기억 단자에 묻어두면 될 일을
심한 건망증으로 그리 못 되고 미련을 떠는 게 오리려 잘 됐다 싶은 생각이 든다.

 깎여지는 나무의 입자가 곱다. 심이 닳아 뭉툭해진 연필은 잘 쓰여지지도 않을뿐더러
원하는 모양을 내기에도 적당하지 않다.

 절제되었지만 날카롭고 힘이 들어간 흑심은 빛이 나는 듯했다.
잘 다듬어진 연필을 필통에 조심스럽게 넣으면서 문득, 번잡해진 내 마음의 군살도
깎고 싶었다.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섬세한 선을 그을 수 있도록 내 안에
뾰족한 흑심의 연필 한 자루 놓아두고 싶은 욕심.

 나는 온전히 객관화 되지 못한 女子이다.

댓글목록

이길영님의 댓글

이길영 작성일

  매끄러운 글솜씨에 女自로 표현하신 한자가 의미심장하군요.저도 한 때 낙서를 좀 하던 날이 있었는데 게을러 지속하기가 어렵더군요.연필을 곱게 깍아 글씨가 이쁘게 잘 씌여지는 느낌을 알만 합니다.마음에 있는 욕심을 잘 간수하시기 바랍니다.잘 읽고 갑니다.

박희진님의 댓글

박희진 작성일

  멋진 글입니다..공감이..^^ 저도 아침에 적으려 미루다 보면 늘 잊어버리게 되죠..그렇다고 메모하는 습관이 생긴 것도 아니고 어중간하네요..ㅎㅎ 연필에 대한 추억도...떠올리게 해주시고... 번잡해진 내 마음의 군살도 깍고 싶다....그 말이 참 맘에 와 닿습니다..^^

이양섭님의 댓글

이양섭 작성일

  연필을 깎으며... 마음의 군살을 들여다보는 님의 자아에... 부러움과 박수를 보냅니다

정윤영님의 댓글

정윤영 작성일

  제목을 女自라 해서 몹시 궁금했습니다. 저도 연필 깎기를 좋아하는데 그냥 무심히 깎지요.^^

이이재님의 댓글

이이재 작성일

  낮과 밤, 그 밝기와 어두움만큼 기온도 차이가 나야겠다는 듯이 더웠다 싸늘하기를 번갈아 반복하는 5월도 어느 덧, 하순으로 접어들었습니다. 역마살도 없는데 가슴을 무겁게 가라앉히는 앙금은 가까운 곳이라도 훌쩍 다녀와야 가벼워지겠노라 협박?을 해댑니다. 여물지 못한 글, 읽어주심만도 고마운데 댓글까지..참으로 힘이 됩니다. 편안하신 밤..~

우정호님의 댓글

우정호 작성일

  저 배경이 어딘지 궁금합니다.

이이재님의 댓글

이이재 작성일

  마이산 탑사 오르는 길목입니다.

한명희님의 댓글

한명희 작성일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마이산 입구 아닌가요?

최명순님의 댓글

최명순 작성일

  맞군요! 마이산 입구! 지나다가 묘한 분위기에 엉뚱한 전설을 믿어버린 순진함이 추억이된 저 곳! 샘의 한줄한줄이 깊이깊이 진한 추억으로 다시 채색됩니다.

박광일님의 댓글

박광일 작성일

  사랑에 계절이 있겠습니까요. 사랑은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찾을 수 있으니..마찬가지로 언제 어디론가 가버릴지도 모르는 것 또한 .... 잘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