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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합꽃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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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복희 댓글 3건 조회 1,636회 작성일 05-07-13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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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늬 뭐하누? ,
이제 그만 하고 오이순  메러 가자. 해그늘 진다."
흔히 농촌의 풍경이 그러하듯 점심을 먹고 나른해진 몸,
토방마루에 뉘이고 늘어지게 한 숨 자고 일어나신 어머니,
해가 서산마루에 올라 앉자
호미자루 하나로 화단을 일구고 있던 내게 밭에 가자고 재촉을 하신다.

“엄마! 이리 좀 와봐 봐”

처녀농군의 노래가 한창 유행하던 때 내 스스로 처녀농군이 되어
오뉴월 불볕을 마다하지 않던 시절,
마당 가 돌담으로 쌓아 예쁘게 만들어 놓은 화단에 하나 둘 피어나던 꽃들은 내 유일한 친구였다.

선 홍의 빛으로 흙 바닥에 배를 깔고 피어나던 채송화를 멀찍이서 바라보며
무더기로 벙그러져 있는 순백의 하얀 백합꽃에 코를 대고 있던 나는
긴 나팔 그 심연에서 우러나오는 향기도 향기려니와 희다 못해 푸른 듯,
시리게 피어난 한 송이 그 꽃의 순결한 모습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색이라고 표현될 수 없는 연 녹의 나팔 그 속에서 씩씩하게도 쑤욱 내민 암술대와
그것을 호위병처럼 둘러싼 수술대, 닭의 벼슬인양 부서져 나플 거리는 꽃밥을

한데 아우른 저 순결한 모습이라니.....
달 밤에 빛나던 그 희디 흰 하얀 꽃잎은 그 무렵 열 여덟 숫처녀의 내게 꽃이 아니라 차라리 순결의 상징이었다.

그뿐인가
어제 밭이랑에서 고단했던 열 여덟의 덜 여문 몸으로,
곤한 잠에서 깨어나 아침을 짓기 위해 눈 비비며 이남박 (쌀을 담아 씻는 바가지)을 들고 광(쌀 곳간)으로 향하다 보면
문득 코 끝에 스치는 그 여리면서도 강렬한 향기에 기어이 그 놈에게 다가가 코 맞춤을 하고서야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백합은 또 한 나를 슬프게 했다.
백합이 필 때면 어김없이 시작되는 장마 비,
사정없이 내리는 장대비에 연약한 백합꽃은 속절없이 고개를 떨군 채 보기 흉한 몰골을 내게 보여주곤 했다.

피었을 때의 그 순백의 화려함은 어디 가고, 짙은 갈색 톤의 줄 죽죽 그어진,
형편없이 일그러져 있는 모습에 대한 나의 실망은 달빛에 반사된 그 빛의 유혹만큼이나 컸던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화려함 뒤에 오는 고독한 쓸쓸함 같은 건 아니었나 싶다.
그도 아니면 지독한 외로움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

오늘 문득 개량되지 않은 토종의 모습으로 피어난 백합꽃 한 송이를 보고
이미 잔주름 그어진 눈가에 눈물 한 점 찍어낸다.
시골 초가집 장독대 옆에 슬그머니 피어나, 그 나긋한 향기를 맘껏 뿌려주고
우기속에 쓸쓸히 잦아들던 그 모습 때문에...


댓글목록

김성대님의 댓글

김성대 작성일

  나리에 대한 생각 - 국민학교, 선생님, 환경미화, 유리병, 신문지, 노랑색흔적......

신혜정님의 댓글

신혜정 작성일

  나팔나리... 처음엔 왜 백합을 나리라고 하는지.. 그랬는데 '나팔나리'라고 들으니까 바로 '왜' 인지 알겠더라구요...

김은주님의 댓글

김은주 작성일

  그래요. 백합은 빗님과 함게 오시지요. 꽃이 피면 큰아들의 생일이 다가옴을 암니다. 복희님, 다 어데로 갔는지 지금은 옛날 그 향기나던 백합을 찾을수가 없습니다. 고은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