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야생식물연구회

자유게시판

HOME>이야기>자유게시판

가을에 부치는 편지

페이지 정보

작성자 이이재 댓글 13건 조회 1,247회 작성일 05-09-23 23:23

본문

                                                    **사진/박광일**


      가을 장마가 들었는지
      비가 들쑥날쑥이며 잿빛 하늘에 먹구름이더니
      오랫만에 활짝 웃는 햇살이
      늦은 오후, 창 밑으로 걸어와 한참을 놀다갑니다.

      노을이 이렇게 고운 가을 해거름
      바다가 보이는 비취 파라솔 노천카페라면 더 바랄 것 없겠지만,
      넓은 유리창에 밖이 훤히 내다보이는
      나즈막한 공간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는 것도
      운치를 더하겠구나 싶어집니다.

      지나간 여름이 내게 있어서는 참 헐거웠습니다.
      그 여유 속에서 세간의 질주를 잊고
      안일한 습에 익숙해지려는데,
      낙엽으로 떨구어 거름으로 묻으라니
      이렇듯 서러워 떨고 있나 봅니다.

      고장난 브레이크에 제동이 걸리지 않듯
      급히 채는 고삐의 위험을 어찌 다르다 하겠습니까.
      민감하게 짓쳐오는 감성은 무분별하여
      용해시키지 못 하고 수용하지 않으면
      어울리는 조화로부터 발효되지 못해 부패할 뿐입니다.

      또한 외바퀴의 굴림은 불완전이며
      감정은 이성으로 다스리는 게 아니란 것을 이젠 알게 되었습니다.

      늘 같은 간격을 유지하며 달리는 자전거,
      그 두 개의 수레바퀴는 감정과 이성입니다.
      둘이면서 온전히 하나가 되기 위해 완벽하게 조율하는 일
      그러나 구르는 횟수가 똑 같다고 말할 수 있나요?

      벌써, 추분입니다.
      올핸 인디안 썸머도 없을 모양입니다.
      하늘을 비추이고 푸르름을 얻은 바닷물에 아픈 상처를 씻고,
      가을볕 좋은 날, 너른 지붕에 그 마음을 널어 뽀얗게 말리고 싶습니다.
      덧나는 일 없도록...
      하여, 조금 더 오-래 가을 햇살이 머물러 주기를 희망합니다.

      변함없이 오늘도, 떨리는 손끝으로 빨간 우체통을 열었습니다.
      녹슬 줄 모르는 빈 철갑, 침묵의 언어 몇 개를 주워 가슴으로 삭혔노라 전하며
      가을에 드리는 편지를 가름합니다.

      그대,
      잘 지내시리라 믿으며...

댓글목록

장은숙님의 댓글

장은숙 작성일

  자연의 이런 모습이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 하는걸 새삼 느끼게 합니다.

우정호님의 댓글

우정호 작성일

  사진과 글이 너무 잘 어울립니다.

김호규님의 댓글

김호규 작성일

  근데 왜 저는 이런 광경앞에서도 시상이 떠오르지 않지요 ? ㅋㅋ 좋은 광경 아름다운 선율이 숨어있을것 같은 언어의 흐름 잘 보았습니다. ^^*

이길영님의 댓글

이길영 작성일

  이 가을엔/ 사랑으로 아파하지 않으리라/ 아직도 상채기에 흐르는/선혈이 너무 아파서/이 가을엔 /사랑하지 않으리.....사람이란게 우째 알다가도 모르겠어서 엊그제의 감정과 오늘의 감정이 다르고,어제 사랑했던 사람이 오늘은 아픔으로 다가오는지 도무지 모르는 띨띨이.오지않을 님을 기다리는 마음은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하여 허우적이는 어리석음은 또 어디서 오는 파장인가.좋은 글 잘 읽고 이 가을엔 무심을 배워봐야겠습니다.

한명희님의 댓글

한명희 작성일

  아~~~~~~~

이양섭님의 댓글

이양섭 작성일

  네....... 자전거의 의미... 빨간 우체통을 여는 이재님의 마음.......침욱의 언어 몇개를 주워..... 이 가을에 이재님의 가을 편지를 받을 수 있슴에 감사를 드립니다

송규현님의 댓글

송규현 작성일

  이 글 내게 부치는 가을 편지인가요? 신이 외로워 인간을 만들었다고 하던데, 인간은 외로워 사랑과 이별을 번갈아 만드나 봅니다.

이영태님의 댓글

이영태 작성일

  이이재님 글을 멋지게 쓰시네요.아~ 감정은 이성으로 다스리는게 아니란 말씀을 알다가도 모를듯...^^.

이영태님의 댓글

이영태 작성일

  다시 되짚어 읽어 내렸습니다.저도 이길영샘처럼 무심을 배워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길영님의 댓글

이길영 작성일

  감정을 이성으로 다스리는 것 쯤이야 어릴적이 아니라면 못할소냐고 생각했던 건방진 시절도 있었지요.허나 살다보니 이성으로 감정이 다스려지지 않는다는 걸 조금씩 알아가면서 철이 조금씩 드나 싶으니 이젠 죽으면 늙어야 한다는 생각이 스미는 시절이 오는군요.젊어서 데미안이나 생의 한가운데를 읽으며 아파하기도 하고 혈기만으로 망둥이가 될까봐 채근담이나 아우렐리우스 명상록도 열심히 읽었건만 익으면 숙인다는 벼를 보고도 삶을 제대로 알아내지 못하고 허우적이는 자신을 보는 때는 안타깝고 서글퍼지지요.허지만 감정이 있기에 사람이지 않느냐고 자위하면서 카타르시스를 잡으려고 허둥대지요.

박광일님의 댓글

박광일 작성일

  자전거를 타고 가다 노을이 좋아서 한 컷 했는데, 가을에 부치는 아름다운 글에 감사드립니다.

이이재님의 댓글

이이재 작성일

  깊숙한 숲에 들어 하늘을 가리운 수목들 사이로 푹신한 낙엽을 밟은 채 맨발로 땅을 딛고 서 있어본 적 있으시던가요? 들숨과 날숨을 거듭할수록 가슴께까지 차오르며 온 몸을 전율로 떨게 하던 그 오르가즘, 느껴보신 적 있으시던가요...? 차마...말로 다 할 수 없는 언어들의 현란한 춤에 어지러워 땅을 요 삼았던 지난 어느 날의 절절한 기억 때문에 가을은 특별한 의미가 되었습니다. 그냥 그랬었다는...그래서 어줍잖은 몇 마디의 안부를 드러냈는데 이토록 관심주실 줄...모든 분께 감사의 노래를 보냅니다. 행복하세요~

이이재님의 댓글

이이재 작성일

  이길영 선생님...! 설명 고맙습니다. 보고싶은 이가 있어 멀리? 다녀오느라 이제서야 댓글을 확인합니다./이영태 선생님...! 좀 난해하셨다면 죄송해요. 다시 읽어보니, 제 표현이 어눌하네요.힛~/박광일 선생님...! 말하지 않아도 감사하게 생각한다는 것, 알고 계시지요?ㅋㅋ 좋은 사진에 자꾸 덧칠을 해대며 망가뜨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늘 조심스럽습니다. 저 이러다 대도大盜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