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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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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이재 댓글 7건 조회 1,227회 작성일 05-10-24 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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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옷깃을 여며야하는 쌀쌀함이 조석마다 살갗을 거칠게 쓰다듬기에 때 이르게 왠 추윈가 싶어
  달력을 올려다보니, 입동을 저만큼 앞에 둔 시월이 제법 깊어있네요.
  여름사이 서로 키재기하느라 술렁거리던 잎새들의 소란함도 잦아들고, 천천히...
  그러나 순식간에 가속도가 붙어 빠르게 만산을 불태워버리겠다는 듯, 가을은 그렇게
  곁에 와 웃고 있었던 것을 애써 모르는 척 외면하고 싶은 치기를 부렸던가 봅니다.

  맑았던 가을, 그 하루...낮동안 등이 참 따스했는데 님계신 그곳은
  어떠셨는지 이제 와 새삼 계간 인사를 여쭙니다.
  가을이 되면 뜻모를 스산함으로 싸한 가슴을 껴안곤 했는데 수십 해를 거듭하고도
  다시 들이고야 만 秋節, '이것 때문이다'라고 근거를 댈만한 까닭을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가을로 접어들면서 나섰던 짧은 여로, 누구의 동행도 허락치 않을 행보에
  단 하나, 당신의 위로가 필요했기에 기꺼움으로 초대된 인연, 기쁨과 희망의 전부였습니다.
  아마...시집 제목이지요?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웅변보다 큰 침묵의 소리를 당신은 듣지 못했고, 기대감으로 너무 들떠있었다는 뒤 늦은 자책.

  삼류 유행가 가사가 지난시절 한 때를 흔들었듯이,
  요즘은 사방의 매개체나 활자에서 종종 그 문맥들을 만나곤합니다.
  각을 세운 말꼬리에서 냉기를 느끼셨다며 까닭을 헤아리고자 하셨지요?
  자신의 삶에 몰입한 모습, 지켜보는 시선이야 부러움을 넘어 존경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스스로는 얼마나 황홀한 경험인지...
  그러나 동행에서 때때로 홀로 남겨짐은 외로움이었고, 보살핌 받지 못하는 서운함은
  쓸쓸하게 그림자가 되어 발자국마다 밟고 다니며 비웃는 듯 했습니다.

  얕은 마음바닥에 기생하는 마뜩찮은 허물들이 설운 가시로 둔갑술을 부렸는지 속내를 후벼대던
  그 후 며칠, 참 어찌해볼 요량 없던 바보스런 미운마음을 오늘은 살갑게 쓰다듬어 주고 싶었습니다.
  경험하지 못한 많은 미숙함에 대해 당신은 아파야 한다고 이해를 도우셨지요.
  볼 수 없는 마음이나, 만질 수 있다는 믿음으로 보듬으려합니다.

  우체국 앞,
  달아올랐던 하루가 바쁜 행인들의 걸음만큼씩 저물어갑니다.
  초록이파리 은행나무는 아직 씩씩한데 금갈색을 띤 은행들이
  띄엄띄엄 보도블럭 위를 뒹굴고 있습니다. 그 중 밟혀서 으깨지는 놈은 운이 없는 거고,
  누군가의 손에 쥐어져 따라나서면 구워지거나 삶아져 먹혀지거나 아니라면, 씨앗으로 남겨지겠지요.
  장담할 수 없는 삶이겠으나, 흙에 묻혀 다시 빛을 보게 될 운명을 지닌 씨앗은
  제 몫을 다하고도 덤으로 얹혀지는 복 터진 녀석은 아닐런지요?

  아~, 그러고보니 생각나는 게 있군요.
  가을은...수확의 계절이라는데 그건 사람의 입장에서 본 것일 테고,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나눔의 계절이 아니겠는지요...?
  이래서 가을은 멋진 계절인가 봅니다. 누구에게나 생각 하나씩을 키워주고 있으니까요.

  당신 곁에서 시봉할 수 없는 안타까움 대신 일상의 생활에서뿐 아니라,
  잠깐의 외출로 산기슭을 돌거나 들판을 걸으며 새벽이슬 내린 둑방 위에서 바라보는 연못,
  물안개와 눈인사 나눌 때에도 나는 당신과 만나곤 합니다.

  생각들을 거두고 다시 시선을 돌립니다. 모두, 어디로 저리 바삐들 걸어가고 있는 것일까요?
  그 걸음에서 문득, 기다림에 지치지 않도록 보폭을 조율하는 배려를 봅니다.
  돌아가 멈추는 곳, 그 걸음에 반가히 맞을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자기의 자리 하나 굳건히 지키게 해주는 옹이 같은 단단한 마음이랍니다.

  잊지 마십시오. 늘 당신을 기다리는 또 하나의 그대가 있다는 것을...

댓글목록

김형태님의 댓글

김형태 작성일

  -- 한 밤 중 문득 켠 컴퓨터에서 좋은 글을 읽었습니다.

김세견님의 댓글

김세견 작성일

  가을은 자기 성찰의 기회이기도 합니다. 나눔의 계절! 가슴에 찐하게 와 닿습니다.고맙습니다.

정윤영님의 댓글

정윤영 작성일

  '이래서 가을은 멋진 계절인가 봅니다. 누구에게나 생각 하나씩을 키워주고 있으니까요.' 그렇습니다. 어제 붐비지 않는 야산에 갔더니 정말 가을색이 고왔습니다. 하루 종일 가만히 앉아 혼자 마냥 호사를 누리고 싶은 풍경이었습니다.

김귀병님의 댓글

김귀병 작성일

  이 가을에 문득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게 하는 좋은 말씀입니다.

홍종훈님의 댓글

홍종훈 작성일

  잘 보고갑니다.

이길영님의 댓글

이길영 작성일

  유치횐의 "행복"을 띄우지 않아도 이 가을이 마음에 흔적을 남깁니다.이 흔적이 날이 갈수록 아름답게 채색되기를 갈망해 보지만 또 다른 그리움을 잉태해서 키우지는 않으려는지 저어되는 마음입니다.님이여,이 가을을 아름다운 자국으로 남기소서 !!먼 훗날 그 날이 참으로 아팠지만 날이갈수록 아름답게 채색되어 가더라 말해주기를 바랍니다.

제미숙님의 댓글

제미숙 작성일

  이 가을이 절절한 글 앞에선  바쁜 일 멈추고 잠시 사색에 젖어들어도 좋을 듯 합니다. 낮에 낙엽 한 장 주워 가까이 있는 아이에게 주었습니다. 책상 유리에 끼워놓은 걸 보고 살풋 웃어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