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야생식물연구회

자유게시판

HOME>이야기>자유게시판

글로 쓰는 나들이/아우에게 보내는 글

페이지 정보

작성자 이이재 댓글 9건 조회 1,641회 작성일 06-06-13 22:11

본문

지난 토요일이었다.
아직은 해넘이도 이른 시간, 느닷없이 쏟아진 폭우가 도심의 거리를 암흑으로 만들어
모처럼 세운 나들이 계획을 망칠까 우려속에 맞이했었던 밤이었는데,
여명부터 밝고 훤하더니 휴일의 아침엔 너무나 반짝이는 햇살이 대지를 가득 비춰주고 있었다.

칠순을 넘기신 친정 아버님의 생신을 맞아 짧은 일탈을 꿈꾸며 모여봐야 몇 안 되는 가족들이
모처럼 가까운 곳엘 다녀오기로 했던 것이다.
몇해 전부터 가진 행사이긴 하나, 워낙 빈곤한 살림을 사는 兄弟妹들인지라
지갑은 비록 가벼울망정 마음이야 어디 넉넉함 뿐이겠는가.

간단히 케잌 커팅을 마치고 孫子女들의 축하노래를 끝으로 발걸음도 가볍게
대문을 나서서 우선 가까운 고창으로 향했다.
양 옆 도로에 우거진 느티나무와 벚나무의 거목들이 커다란 그늘을 만들어 주는
입구부터, 복분자의 향긋한 내음과 빠알간 딸기는 눈과 코를 즐겁게 해 주었고
발장단과 콧노래가 절로 흥겨웠던 시간, 선운사 도량을 지나쳐 숲속으로 들었다.

도솔암을 오르는 길섶엔 '장사송'이 있어 그 이름(선운사)을 더욱 빛나게 하는데,
반송인 이 소나무의 수령이 600년이라니 내 잣대로야 감히 짐작이나 하랴.
그다지 가파르지 않는 숲길을 걸어 일차 목적지인 도솔암에 다달았다.
애기단풍들의 속삭임이 퍽 평화로워 한숨을 돌리고, 경건한 마음으로 다시 '마애불'
앞에 두 손을 모아 잠시 합장을 한다.

내려오는 길목엔 도란도란 이야기 꽃들이 피어 녹차밭에 뿌려지니 초록향이 어디 따로 있겠는가,
서로간의 사랑 깊음을 확인하니 그 열매가 바로 달콤한 초록향인 것을.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일년 만의 외출이니 몸보신도 할겸 바닷가 근처 식당엘 들러
장어구이를 먹는데 식구 여덟이서 열 두마리, 3Kg이나 먹어 치웠다. 거금 9만원...헉~ㅜ.ㅠ

다시 위로 차를 몰아 부안으로 향했다.
언젠가 왔을 땐, 새만금과 곰소를 들렀기에 이번엔 내소사를 가 보기로 했다.
세상에나...~! 물결을 이룬 것은 사람과 차량들...인산인해가 따로 없었다.
요즘들어 부쩍 '영화 촬영지이다 드라마 배경으로 나왔던 곳이다.' 하여 유명세를 타고 있었던 모양.
그러나 내소사를 품고 있는 게 바로, 능가산이 아니던가.
산사 입구엔 상가 건물을 짓느라 소란스러웠지만, 모두를 품고도 남음이 있는 곳.

경내를 들어서기 전, 그 유명한 전나무 숲길을 만나게 된다.
무엇보다 포장되지 않은 산사 입구는 특히 전라도의 사찰에서 자주 볼 수 있는데
어딜가나 나는 그런 길들을 침이 마르도록 자랑한다.
우람한 전나무는 뜨거운 태양의 범접함을 허용치 않았다.
적당한 습기와 빛살과 공기가 어울려 최상의 기분을 만끽할 수 있게 했던 그 순간,
"좋다, 좋다!"를 연발하시던 아버지의 감탄사를 다시 듣는다.

천년고찰이란 말이 어색하지 않게 경내에는 천 년을 살았다는 느티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오가는 모든 중생들을 보듬고 있었고,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보리수나무도
그 수령이 300년이나 되었단다.
나야 몇 번 들러 철야정근에 동참도 했었기에 낯익은 것들에 대한 정겨움으로 새록새록 돋는
인연에 감사한 마음이지만, 다른 식구들은 경외감마저 드는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다.
입장료가 비싸 꿍시렁거렸던 초입의 기분이 언제 그랬냐는 듯 싹 가셔지고 놀랍고 또 놀랍다는 표정일 뿐...

아버님은 퇴행성 관절로 수술도 못 하시고, 엄만 작년에 당한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으깨진 발목이 아직 완치되지 않아 두 분 모두 서거나 앉거나 걸어야 하는, 같은 자세로 오래 계시는 게
문제가 있는데 아프기는 커녕 피곤하지도 않으시단다.

돌아오는 길, 정읍에 사는 벗님네 한테 들러 너무 맛있는 해물 누룽지탕을 얻어먹고 어찌나 배가
부른지 일어서지도 못하고 한참을 앉아 있는데 소화제라며 녹차까지 우려주니 좋은 차 마시는 호사까지 누렸다.
내장사에서 백양사 넘어오는 고갯길을 구비구비...장성 병풍산을 가로지르며 밤을 낮처럼
훤하게 밝힌 보름달과도 해후하는 특권을 누렸다.

행복했던 하루...무엇으로 이 뿌듯한 시간을 살 수 있더란 말인가.
아쉬운 게 있다면, 너무 멀리...말도 환경도 다른 곳에서 고생하고 있을 아우 생각에 목이 메인다.
가난은 죄가 아니라고 하지만, 몇 십 년을 살아보니 어쩌다가 한 번쯤은 '죄더라'는 결론에
머물 때도 있었다. 돈이 없으니 사람 노릇 못할 때도 많았고,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무리들로 하여
절망의 눈물을 흘렸던 적도 있었다.

'일체유심조'라 했던가.
흔들리는 것은 네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마음이었던 것임을, 이제 와 의심해 본다.
카메라가 없어 발길 머물렀던 순간의 생생함은 전하지 못하지만
짧은 붓으로 더 짧아진-실속없는- 내용을 길게 늘어놓았다.

너 만은 이해하리란 믿음이 있기에...

*이제서야 사랑을 배워가는, 철없지만 씩씩한 아낙.

댓글목록

박대철님의 댓글

박대철 작성일

  보람있는 하루 이셧군요.일체유심조라는 말 저도 항상 가슴속에 간직 하고 있지요.

우정호님의 댓글

우정호 작성일

  제가 사진 조금  추가해 볼깨요

김종건님의 댓글

김종건 작성일

  늙은 부모님 생각에 가슴이 아림니다.

이한윤님의 댓글

이한윤 작성일

  정감과 풍경이 아련합니다.

이금선님의 댓글

이금선 작성일

  행복한 가족 나들이를 하셨군요. 풍경을 사진으로 보는것 같습니다

김익중님의 댓글

김익중 작성일

  내장사 - 백양사 8킬로 구간은 대학시절 걸어서 간 적이 있구요, 풍천장어도 몇 번 시식해 보았답니다. 추억이 살아나게 하는 글, 부모님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글, 잘 읽었습니다.

김귀병님의 댓글

김귀병 작성일

  행복한 날들이 오래도록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씩씩한 아낙인 줄 오늘에서야 알았습니다. ^^

이길영님의 댓글

이길영 작성일

  기쁨과 회한으로 가득 채운 글에 가슴이 먹먹해집니다.추억을 더듬는 길이라서 더욱 또렸이 그려지네요.나는 어설픈 솜씨나마 반야심경을 병풍으로 만들어 제양 때 마다 쓰고 一切唯心造는 부끄러운 솜씨지만 내가 쓴 것이니 액자로 걸려 있지요.

이이재님의 댓글

이이재 작성일

  몇 번의 망설임 끝에 영글지 못한 글을 올렸었는데, 늘 그랬던 것처럼 송구하고 민망하기 짝이 없습니다. 괜한 짓을 했다는 자책도 들구요, 부족하고 서툰 글 읽어주시고 더불어 격려주신 많은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말씀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