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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을 들여놓으며...사진/정경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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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이재 댓글 10건 조회 2,151회 작성일 06-12-07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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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 / 정 경 해>
                 이젠 떠나버린 가을 앞에서, 
                 창가에 놀러와 준 따순 햇살 한 줌 들여놓으며 이 글을 쓴다.

                 이른 출근으로 아직 해가 뜨기 전, 동동이는 걸음으로 도착한 일터에서의 나의 첫 일은 
                 어질러 놓은 인도를 쓰는 것부터 시작된다.
                 밤 사이 버려진 댐배꽁초와 껌종이, 빈 종이컵, 
                 그리고 바람에 떨어져 제 멋대로 뒹구는 은행잎과 떨켜로부터 낙하되어 
                 맥없이 흩날리는 낙엽들...그렇게 계단과 인도를 꼼꼼하게 쓸던 빗질이 끝나면,
                 다시, 섬유 린스를 살짝 뿌린 밀걸레로 쓱쓱 윤기가 돌도록 닦아낸다. 

                 쓸고 닦는 일이 끝나면 현관 출입문을 활짝 열어 탁한 공기와 시원한 바깥 바람이 서로 만나, 
                 적당히 뒤섞여 놀 수 있도록 건조함과 상큼함을 대기실 가득 들여놓는다.
                 2층과 3층, 마지막으로 4층을 오가며 몇 번 몸을 부리노라면, 후끈한 열기가 가슴으로부터
                 손끝과 발끝까지 전해져 뜨거운 기운이 솟구쳐 옴을 느낀다.
                 이러기까지 대충 한 시간 정도 걸리는데 그 때의 시간이 아침 8시,
                 적당히 고픈 배를 안고 식당으로 향한다.

                 3층 한 켠에 위치한 구내식당은 언제나 따뜻함이 있어 시도 때도 없이 애용하는 코너다.
                 식당을 담당하는 큰 성兄의 손맛이 깔끔하고 좋아 일터 식구 모두가 좋아함은 너무 당연한 일,
                 된장국이나 콩나물국, 혹은 미역국이 아침 주 메뉴인데, 
                 특별한 재료없이도 어쩜 그렇게 맛을 잘 내는지...

                 식사가 끝나고 티 타임(식당보조 작은 성이 올 때까지)... 
                 녹차를 주로 애용하는데 특히, 직접 제다를 한 녹차를 마실 때의 그 기분이란...
                 비가 오는 날엔 헤즐럿을 음미하기도 하고, 가을엔 국화 차나 백련잎 차,
                 일엽차와 녹차를 즐긴다.
                 요즘, 위 부위 혈관에 혈전이 생겨 약을 복용하는 큰 성이 커피를 피해야 하기에
                 오늘 아침은, 수제작으로 선물 받은 녹차를 마시기로 했다.
                 다관에 우려낸 차를 걸름망에 곱게 내려 오너에게 드리고,
                 큰 성과 나란히 앉아 차를 마시다가 문득, 창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과 마주쳐 움찔거렸다.

                 겨울 초입에 느닷없이 쳐들어 온 부신 햇살...
                 그 덕으로 창문에 기대어 여전히 푸르게 자라고 있는 풍선덩굴과 만나게 되었다. 
                 날마다 부딪치는 똑같은 시선일지라도 어느 한 순간,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게 있듯이
                 오늘 아침, 풍선덩굴로 향해진 내 시선에서 그런 깨달음을 얻었다.

                 가을 초입에 지인으로부터 씨앗을 받아 작은 포토에 심었는데, 이젠 다 자라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고...그러더니 아래쪽 잎이 누룻누룻 벌써 퍼석퍼석 해지고 있다.
                 열매 주머니가 제법 익어간다 했는데 역시나, 이별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아침에 분주히 움직이며 눈에 거슬려 쓸어버린 많은 것들...
                 버려진 그들도 한 때는 누군가에게 다 필요했으리라. 

                 냄새나고 더러워 장갑을 끼고 주웠던 꽁초는 이름 모를 사내 손에서 생을 마감했겠지만, 
                 그 순간 만큼은 그 주인에게 소중했으리라.
                 어쩌면 한 모금 깊게 빨아들이는 담배 연기가 고달팠던 하루의 피곤과 짜증을 삭혀냈을 지도 모르고,
                 혹은 새로운 각오를 다졌을지 누가 알겠는가.
                 그리고 그는 기다리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커피 향이 밴 빈 종이컵은, 진향 향과 따뜻함으로 밤바람의 찬 공기를 눅이며 손끝과 입술을 거쳐 
                 위 속으로 젖어들며 추운 밤 온기를 불어넣었을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혹은 막차를 타려던 잠시의 쓸쓸한 빈 시간을 기꺼이 뎁혀 주었으리라. 

                 여름날, 땡볕을 가리는 그늘이 되어 오가는 길손들의 지친 어깨를 시원스레 부채질 했던 은행잎과, 
                 제법 신록 티를 내던 키 작은 단풍 잎도 제 몫을 다한 채 떨켜로부터 스스로를 떨궈,
                 다시 그 자리를 채울 또 다른 미이지의 생명에게 자리를 내어주며 세상과의 미련을 잘랐으리라. 

                 아...생명들의 신비함이여!
                 그들 앞에 나는...무엇을 내 놓을까.
                 미물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 바로 나는...
                 누구에게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되었던 적이 있었던가.
                 나로 인해 행복하다는...그 누군가가 있기나 했었던가.

                 돌아올 수 없는 날들에 대해 반추하고, 
                 남아있는 시간들을 관조할 줄 아는 지혜까지는 없더라도,
                 누군가에게 한 번쯤은 나로 인해 이익利이 되는 삶이기를...

                 내가 받은 사랑으로 행복했던 순간들을 기억하여 
                 그들에게 작은 기도라도 드릴 수 있는 양심을 갖게 되기를...

날이 찹니다. 그렇잖아도 힘이 드는데 말입니다. 
그래도 기운냅시다!!

댓글목록

우정호님의 댓글

우정호 작성일

  우와~~ 제가 본 이이재님 글중에 가장 긴 글이네요 모처럼 연차를 냈더니 잠이 오질 않아 들어왔더니 글을 처음 보게 되네요 글보니 이메일 친구들에게 보낸 내용들이 생각납니다. 예전에는 이런 하루일과도 많이 보냈는데.. 요즘은 게을러져서 두달에 한번 보내는 것도 힘이 듭니다. 

임영희님의 댓글

임영희 작성일

  이이재님은 녹차를 즐겨 드시나 봅니다.^^  저는 어제 커피를 여러 잔 마셨더니..... 이시간이 되도록 컴 앞에 앉아 덕분에 좋은글 읽고 들어갑니다.^^*^^

박대철님의 댓글

박대철 작성일

  항상 가슴에 와 닫는 글을 독백하듯이 쓰시는 이재님이 궁금하군요.
저는 아에 집에서 녹차를 만들어 종일 붕어처럼 마시고 있습니다.

이이재님의 댓글

이이재 작성일

  글 몇 자 수정하러 왔다가 새벽에 남겨주신 따뜻한 댓글을 봅니다. 아들이 컴 내놓으라는 재촉에 마무리를 못한 채 잠자리에 들었었거든요. 역시 정호님은 멋쟁이세요. 지금도 이메일 주고 받는 친구가 많다니... 영희님! 그대의 박식함을 추종합니다. 숙면에 지장이 된다면 카피를 조금 줄여보심이... 그리고 박선생님...! 역시, 녹차 동네에 사시니까 다르시네요. 차로야 즐기지만 그냥 물은 붕어까진 아니더라도 한두 잔 마셔보려 하는데 그것도  쉽지 않네요. 습관 바꾸기가 이렇게 어려울 줄...활기로 가득찬 멋진 하루 맞으세요~

송정섭님의 댓글

송정섭 작성일

  글 속에 참 좋은 마음들이 깃들어 있습니다. 정신없이 바쁜 주중 아침에 얼른 보고 말기엔 너무 아까운 글인 것 같습니다. 다시 찬찬이 읽어봐야겠습니다.

김종건님의 댓글

김종건 작성일

  좋은 글입니다. 그런데 저는 커피의 불편함이 녹차에서도 나타나던데... 불면과 부정맥,  다른 분들은 괜찮은 모양입니다.

박광일님의 댓글

박광일 작성일

  겨울을 맞으며 일어나는 일상의 일들이 내 주위에도 흥건한데, 주어 담지는 못하고 이재님의 글을 보고 새삼 느껴집니다. 따뜻한 겨울 나시기를 바래봅니다.

이길영님의 댓글

이길영 작성일

  모처럼 떨켜에서 벗어난 잎들이 수북한 모습을 담느라 주변을 몇 바퀴 돌았는데 어짜피 삶의 애환으로 이어지네요.일상에서 느끼는 포근함이나 껄끄러움이라는 것도 결국 별로 다르지 않건마는 사람의 마음이 어찌 그리 얄팍해서 어느 땐 상큼하고 어느 땐 심란한지 영 갈피를 잡지 못하는 마음.그래도 편안한 마음으로 느긋한 일상을 맞고픈 마음이야 항상심이겠지요.상큼한 마음 잘 느끼고 돌아섭니다.

이금선님의 댓글

이금선 작성일

  이이재님 글 너무 좋아요

이향숙님의 댓글

이향숙 작성일

  역시~~이이재님 이시네요...일상적인 모습 조차도 아름다운 영상으로 피워내시는 님 부러움입니다~~따뜻한 겨울 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