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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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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이재 댓글 10건 조회 1,751회 작성일 06-12-28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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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같던 날이 어제 오후부터 심상찮더니 급기야 이른 아침,
출근을 위해 현관문을 열었다가 와~~~밤 새 내린 눈으로 하얀 세상과 만나게 되었는데,
그래도 영하의 날씨가 아니었던지라 오래 묵은 차를 끌고 조심조심...일터로 향했습지요.

갈대비보다 조금 억센 수수비를 들고 출입문에 제법 쌓인 눈을 싹싹 쓴 다음,
비스듬히 올라오는 계단 앞 대리석 바닥에 이불 두 장을 또 깔고,
그것으로 모자라 염화칼슘을 뿌리고...

하루종일 창밖을 내다보며 바깥 날씨를 살피는데 아침 나절엔 그나마 간간히 햇살이
보일둥말둥 하더니, 점심 지나고서는 눈보라가 조금도 잦아들 기미가 없어보입니다.
어둠이 내리면서부터 기온이 내려갈까 이젠 조바심마져 듭니다.

어쩔 수 없지요. 해마다 겪어야 하는 일인 것을...그래도 눈구경 못하고 산다는
다른 지방보다 좋을 때가 더 많습니다. 
여튼, 퇴근은 해야겠기에 준비를 하고 1층으로 내려와 도로를 살폈더니
다행히 아직 얼지는 않았습디다.

해서 주차장에 가서 차를 빼 우로 팍 꺽었지요.
노상 주차장에 차를 댄 다른 이들의 차를 보니 참...걱정되더만요.
저야 반지하(부지런히 출근하는 덕에ㅋ~)에 넣어 뒀던지라 눈 터는 번거로움도 없이
씩씩하게 돌렸는데 골목이 많은 게 문제라면 문제랄까...
ㄹ-자도 아닌데 불과 몇 십 보 되는 골목골목을 무려 다섯 번이나 거쳐야 한다는 것.

세 번은 큰 어려움없이 슬슬 기었는데 아뿔싸!!
네 번째에서 돌자마자 사거린데 앞에서 나오는 차와 거의 동시에 만나게 될 운명.
앞 차는 좌회전, 저는 우회전...제가 빨리 달릴 수 없어 브레이크를 살짝 밟고 그 차를 앞세웠지요. 

그게 화근이라...ㅠ.ㅜ 
15 도쯤 경사가 있는 4차선인데 2차선엔 차들이 몽땅 주차되어 있고,
반대 차선은 차들이 느린 속도로 진행 중이고...
5 미터 정도 가서 다시 우회전을 해야만 평지인데 그만 헛바퀴에 걸리고 말았으니~
오도가도 못합니다. 우회전하는 중이었던 지라 운전대도 반듯하지 못하고,
이제서야 겨우 초보딱지 떼나했는데 딱 걸리다니...!!
바퀴는 조금씩 미끌리면서 1 센치씩 앞으로 옆으로...세울 수도 없습니다.
제가 1 차선을 몽땅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손바닥에선 진땀이 나고 등줄기에서도 식은땀이 솟는 것 같습니다.
눈보라는 여전히 그칠줄 모르고, 행인들의 걸음도 모두가 종종입니다.
가끔, 워낙 시끄러운 제 차 소리에 얼굴을 찌뿌리며 걷는 분도 계십니다.
그냥 버스 타고 갈 걸...후회 막급입니다. 실은 택배로 온 물건만 아니었다면, 대중교통을
이용했을 텐데 아들이 꼭 필요하다고 주문한 거라, 버스에서 내려 10분도 넘게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느니 그냥 싣고 가야지 했다가... 

그렇게 얼마간을 혼자 낑낑 대는데 학생 하나가 갑자기 인도에서 내려오더니,
제 차를 밀기 시작합니다. 아아아~~!! 감동!! 감동!!! 먹었습니다!!
혼자선 도저히 가망이 없겠다 싶은지 인도에서 웃으며 바라보고 있던 친구를 또 부릅니다.
화물차에 가스 차인지라 경차이긴 하지만, 그래도 차는 찹니다.
아이 혼자서 밀기엔 역부족, 친구도 달려듭니다.
십 여분쯤...우,좌로 흔들리며 밀고 당기고, 가까스로 우회전에 성공,
 6 차선 대로에 올라섰습니다. 아흐흐흐흐~~~~

정신을 차려 갓길에 차를 대고 비상등을 켜 놓고 차에서 내렸습니다.
아이들을 찾으니 그 새 안 보입니다. 허걱!!
저쪽 신호등을 따라 벌써 건너고 있네요.
막 뛰었지요. 붙잡았습니다. 인도로 올라서서 두 녀석을 팍, 껴 안았지요.
손도 잡고, 옷깃도 여며주고...마음 같아선 저녁을 함께 먹으며 녀석들의 언 볼을 녹여주고 
싶었지만, 상황이 그럴 수 있는 게 아니었던지라 지갑에 든 돈을 몽땅 꺼냈습니다.
한사코 안 받겠다고...흑!! 호주머니에 푹 찔러주니 다시 꺼내 만원 한 장만 가지곤
나머진 돌려줍니다. 다시 감동~!!(참고로 전 지갑이 항상 무지 가볍습니다.)

녀석들의 입가에 웃음이 활짝 핍니다.
하늘을 보며 셋이 그렇게 길거리에서 ㅎㅎ거리며 웃었습니다.
오는 동안 내내...마음이 너무 벅차서 실실거렸습니다.
집에 오자마자 아들한테 자랑하고, 하던 얘기 또 하고...

이름이라도 물어볼 걸, 전화번호라도 알아올 걸...
아쉬움이 막 밀려듭니다.
나야 오래오래 그 애들을 기억하겠지만, 그들을 위해 가끔은 두 손을 모으겠지만,
연락처를 알았다면 한자리에서 만나 한 번 더 실컷 웃어볼 수 있었을 것을...
  
그 친구들,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겨 막 떠들고 자랑했으면 좋겠습니다.
참...뿌듯하고 행복한 밤입니다.
모든 행인들이 그저 바삐 걸어갈 뿐인 그 길에서, 아니...
시끄럽다고 짜증섞인 얼굴로 한심한 나를 탓하며 어른들이 조롱하던 그 추운 길에서,
그렇게 힘도 쎄 보이지 않았던 이제 겨우 고 1,2 학년 쯤인 이쁜 아이들...
너무 고맙고 감사했더랬습니다.

살만한 세상, 아름다운 이야기...이렇게 글도 쓸 수 있게도 해 주고...
꼭 복 받겠지요? 
세모 밑에서 만난 우연, 참 큰 기쁨.

이름도 성도 모르지만, 우리들의 미래를 걸머쥔 친구들을 위해 
여러분도 기도해 주시지 않으시겠어요?
보이지 않는 세상 곳곳에서 댓가 없이 혹은,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서...아자아자아자~~!!!

댓글목록

우정호님의 댓글

우정호 작성일

  어느 보이스카웃이 도와주고 난후 이름을 가르쳐 주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이름은 흔한이름이라 찾지 못했다고 한 기억이 납니다 훈훈함이 느껴져서 좋아요 내년에 차를 사면 어떻게 몰지 은근히 겁도 나고..

김세견님의 댓글

김세견 작성일

  이 세상이 그리 험한 세상만은 아니라는걸 생각하게합니다.

김장복님의 댓글

김장복 작성일

  출근하자마자 들른 114에서 이런 즐거운 글을 읽을 수 있어 저 또한 기분이 후련해집니다.
부지런히 뒤쫓아가 지갑터는 모습을 그려보곤 웃어봅니다.
차를 밀어준 학생들과 고마움을 표시하는 이이재님 모두 아름다운 모습이군요.

김종건님의 댓글

김종건 작성일

  아직도 우리사회가 건강하고 살만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것 같습니다.

이길영님의 댓글

이길영 작성일

  가끔은 팍팍한 세상이란 생각도 들고,하루에도 몇 번 씩 기분이 흐렸다 개었다하는 게 사람의 마음이지만 살맛나는 세상을 만났군요.고 녀석들 이쁘고 귀엽네요.잘 자라 금강송이 되거라.

송정섭님의 댓글

송정섭 작성일

  시작보다 중요한 게 아름다운 마무리라고 하던데... 정말 한 해를 아름답게 마무리하시네요. 저도 덕분에 가심이 훈훈해 집니다. 

이금선님의 댓글

이금선 작성일

  그 학생들도 잘 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뿌듯하고 행복했을 겁니다

이향숙님의 댓글

이향숙 작성일

  그  이쁜 마음 어른이 되어서도 곱게 간직하고 살아가면 좋을텐데~~왜 어른이 되면 이기적으로 변하는지 아쉽더군요...기분좋은 날입니다~더불어 함께~^^*

김진옥님의 댓글

김진옥 작성일

  기도를 해야지요 !!!! 두 손 꼭 모으고요.고렇게 멋진 녀석들이 있어 세상은 아름다운 것이지요!

구대회님의 댓글

구대회 작성일

  음악이 너무 좋네요. 황야의 무법자도 생각나고 남미 산악지역의 목동들 생각도 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