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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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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olive 댓글 12건 조회 1,750회 작성일 03-11-04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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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했네]

환기 위해 창문을 열자 나무들 어둔 실루엣 아슴프레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고
훅 끼쳐 드는 찬 기온은 담박에 의식 속 겨울 내음을 불러낸다
가난한 쪽방촌에 왠 붉은 십자가가 그리 많은지
서켠창을 열어도 붉은 십자가,
해 뜨는 방의 창을 열어도 붉은 십자가가 골키퍼처럼 어김없이 앞을 가로 막듯 팔을
벌리고 있다
붉은 십자가가 있어서 달빛을 방해하거나 별빛을 삭히는 것은 크게 아니고
단지 불빛이 내 숙면을 방해한다
언젠가 높은 곳에 올라 내려다 본 서울의 야경은
크고 작은 건물의 빛이나 도로 다리 등의 긴 불빛들 보석목걸이 같았고,
붉은 십자가들은 거대한 공동묘지를 연상케 했었고 그땐
십대였기에 참으로 진지하게 붉은 색조의 상징에 대해 생각했었다
신앙에서 이념에서 의학에서 이런저런 산업공간에서의 기호색에 관해서.
평화롭고 아늑하게 초록이나 노오란 십자가를 달면
혹시 교인들이 붉은 색조만큼 강렬한 그 깊은 믿음을 상실하여
교회 일이나 ..십일조를 느슨하게 낸다는 것일까..뭐 그런 생각도 좀 한듯하다
이야기가 또 다른 곳으로 빠지고 있는데, 역시 그 만큼 붉은색의 집중력을 증명하는걸까..

그 창문의
불이 꺼진지 몇일, 아니 오래 된듯하다..
어느날 여행에서 돌아오니 그 창의 불이 꺼져있었고,
또 그 다음의 여행에서 돌아왔을때에도 창에는 불빛이 없었다
나는 이제는 집에 있는 한낮에도 화장실의 작은 창으로 이따금 그 창을 바라보곤 한다
어디로 간 걸까..

처음에 그 창의 불빛을 본 것이 언제였는지 나는 모른다
이사를 온 것이 매화가 피어있던 봄날이었으니 아마, 그 즈음이었을 것이다
한밤이라 부를만한 오전세시..네시..다섯시..여섯시 때때로, 내가 잠자리에 드는
아침해가 뜨는 시간까지 그 창은 불빛을 밝히고 있었다
나는 때때로의 고적한 시간에
문득 이 세상에 사람들이 살고 있는 걸까 싶은 그 막막한 순간에
화장실에서 그 불빛 드리운 창을 바라보고 위안을 삼고 있었다
무얼 하는 어떤 사람이..
누가 살고 있는지, 독신인지 일가족이 살고 있는 것 인지 , 남.녀.노.소..
아무것도 모르면서 모두 잠든 때때로의 한밤에
늘 불을 밝히고 있는 그 창에 무심히 눈길을 주었었다
어쩌면 환경적으로 익숙한 습관이라거나 혹은 불면의 동지애 같은 것도 있었나 보다..
이제 서켠창가 바람찬 계절에서야
나는 지난 봄부터 여름지나 지금껏 그 불 켜진 창과 사랑을 했다는 걸 깨닫는다
아아,, 부디 사람들의 사랑이 어떠한지 내게 말하지 마라
사랑은 경우의 수가 제 각각 다 다른 것이니…분명 나에겐 사랑이라 인정할 만한 것이었다
단지 불 켜진 창, 창의 불빛과 사랑을 했다는 걸 이해하려면 깊이 외로운 사람은 알 수 있다
나에겐 말없는 위안이었고
서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한가지 분명한건
불 켜진 창과 나, 많은 날들을 같은 시간대에서 같은 시간을 공유한 것이기도 했으니…
나는
불이 꺼진 그 창을 바라보면서
잠깐잠깐씩 이런저런 상상으로 창의 불이 켜지질 바라는 기다림을 갖고 있었고
어느 순간에는 몹시 슬픈 가정을 해보고는 이내 고개를 저으면서 우울해지기도 했다
지금도 나는 주검처럼 검게 침묵하는 암전된 저 창의 불이 켜지길 기다린다
어느 순간에 …어딘가 먼 여행을 떠났던 창의 불빛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내가 잠들었던 시간에 돌아와도 좋고 내가 깨어있는 시간에 돌아와도 좋다
난 창의 불빛이 켜지기를 기다린다..

나에게 말없이 깊은 위안이었고,
습관적인 환경의 익숙함이나 친숙함이라거나 긴 불면의 시간
서로 인식하지도 못하는 그 우연한 시간의 동행이었을지라도
무엇보다 이런 마음쓰임으로 기다림을 갖게 하는 것 이라면 그건 사랑이었지 않은가...


사족:
이웃과 내왕하지 않는것이 당연지사인양 - 이웃에 누가 사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
삭막한 도시의 아파트.. 원룸촌...이라지만
그러나 때때로 누군가는 그저 당신 창의 불빛만으로도 위안을 삼고, 관심을 기울인답니다
사람은 저마다 거리를 둔 섬 같은 고독한 존재들이라지만
세상 혼자 외롭다 여기는 사람들이여..
olive 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소중한 사람들이여..
이따금 사랑의 마음으로 스스로가 무언가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찾아보시기를..
혹시라도, 세상에 대해 '혹독하고 냉정'하기만 한 느낌이나 자세로 한 생을 살 수는 없지 않은가요..

댓글목록

윤영철님의 댓글

윤영철 작성일

  올리브님은 사람이나 사물에대한 섬세한 통찰력과 애정을 지니신것 같아 늘 부럽습니다.올리시는 글 잘 보고 있지만 댓글은 처음입니다.참고로 전 윤영철씨의 안사람 됩니다.감사합니다.

최매천님의 댓글

최매천 작성일

  창을 가리는 붉은 십자가가 여기 저기 있다고 하였습니다. 붉은 십자가는 교회의 첨탑에 올려진 십자가이리라 짐작됩니다. 그런데 붉은 십자가는 적십자의 상징입니다.전쟁터나 재난시에 세계어디에나 나타나는 적십자는 민간 봉사단체의 표상입니다. 세계에서 적십자가 없는 나라는 아마도 거의 없을것입니다. 붉은 십자가 붉은정사각형이 다섯개모여있는 형상은 적십자입니다. 아랍권에서는 십자에대한 거부감때문에 붉은초승달모양의 적신월로 표시합니다. 적십자는 어둠을 밝히는 등불입니다. 이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지켜주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의무입니다. -알버트A.슈바이쳐-

최매천님의 댓글

최매천 작성일

  올리브님의 글을 읽으니 어릴적 보았던 창이 생각납니다..... 아 옛날이여~~~

olive님의 댓글

olive 작성일

  특정 종교에 관한 나쁜 생각은 아니구요.. 저는 종교는 없고 다른 종교를 반대하지도 않습니다 ..저희 집은 제사도 지내고 교회나 절에 성당에 나가는 사람 각각입니다 .. 가난한 동네에 두드러져 보이는 붉은십자가.. 다른 나라에서는 우리나라만큼 붉은 십자가를 많이 보지 못했었기에..특이하게 보였습니다

olive님의 댓글

olive 작성일

  윤영철 선생님 사모님, 최매천님.. 저는 이 야생화홈에서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다만 카메라 들고 자료 찍어올리지 못하고 다른분들의 노고를 누리기만 하는게 미안하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최매천님의 댓글

최매천 작성일

  저두 울나란 십자가가 많다는 소리 들었습니다. ㅎㅎㅎ 그냥 적십자와 교회십자가는 조금 다른 성격이라 말씀드린것 뿐이오니 .... 기분상하지 않으셧음 .....님 글에서 현상에 대하여 많이 생각케 합니다. 늘 감사히 읽고 있습니다. ^^*

olive님의 댓글

olive 작성일

  최매천님 .. 늘 감사하게 읽습니다.. 지난번 오동나무 열매 참 감사했고요 덕분에 더 나아갈 수 있엇습니다 / 오동나무 열매에 카페인 성분이 있어 커피 대용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는걸 처음 알았습니다..그외에도 훌륭한 공부가 되었는걸요../ 적십자.. 슈 할아버지 말씀에 동의 합니다^^*

이영주님의 댓글

이영주 작성일

  그렇지..나도 창밖을 가

이영주님의 댓글

이영주 작성일

  끔씩 보는 습관이 있는데 그때 마다 무언가를 생각했었지..그게 이제 무언가를 알려 주는듯 해서 좋구만요..

olive님의 댓글

olive 작성일

  어디, 하늘의 별만 아름다운가요.. 지상의 불빛들도 보석을 흩뿌린듯 아름답지요 ..누군가, 창의 불빛도 그 아름다운 보석중 하나이구요..

olive님의 댓글

olive 작성일

  선진국에서는 소방관이나 해양 인명구조대 산악구조대 이런 일을 하시는 분들이 인기가 높지요.. 저도 연예인들보다 이런 일들을 하시는 분들이 멋져보여요^^**

황숙님의 댓글

황숙 작성일

  훗 ~~  감미롭다는 말씀 보다는..  내면으로 스며드는.. 달콤한 깊이를 가늠 하게 하시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듯 합니다/ 스스로 칭칭 동여메는 .. 누엣고치 같은 모습들에서 ~~/ 선뜻 다가 갈수 없는 굴절된 순수에서~~/우리는 의아해 하고 사는지도 모릅니다/뒤죽 박죽... 아비규환..  /  물고 무는 ..순리 없는 생존경쟁들~~/  물꼬를 트면 물은 스스로 들어 오기 마련 인데도~~/ 논 뚝 높이 만큼이나 맘을 닫아 거는 모습도 있습니다../따지고 보면...사람이 사는 세상 인데도../사람은 뒷전으로 밀려나 있는것도 사실 입니다/  진리..돈,명예,권력.../ 거기에 눈이 멀고..몸이 상해도 좋으니 말입니다../자연한 이치에~~사람 또한 ..자연인이면 더 없이 좋으련만~~물처럼~~바람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