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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꽃 이야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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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귀병 댓글 15건 조회 2,514회 작성일 04-02-02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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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오장폭포의 겨울

  해마다 겨울이면 내가 살던 산골마을은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두텁게 덮혀 이웃과의 왕래 마저 불편했던 적이 자주 있었다.  몇 일간 폭설이라도 내리면 산비탈의 아름드리 노송은 내린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가지가 부러지기 일쑤였고, 심지어는 송두리째 넘어지기도 하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밤 사이에 내린 눈으로 삼라만상은 은색의 세계로 바뀌어 고요한 정적만이 감돌고, 보름달이라도 뜨는 밤이면 새하얀 눈이 달빛에 반사되어 황홀한 산골마을의 정경을 연출해 내던 모습이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눈 내린 마당에 삼태기를 고여 모이를 뿌려 놓고, 고인 나무받침에 끈을 묶어 방까지 연결한 다음 창호지 구멍 사이로 가슴 졸이며 지켜보다가 허기진 맵새라도 모여 들면  잽싸게 줄을 낚아채 새들을 포획하던 즐거움, 바람 부는 날이면 휘날리는 눈보라와 함께 소나무 가지를 윙윙 울리는 바람소리를 문풍지 사이로 들으며 보낸 긴긴 겨울 밤, 얼어붙은 강에서 친구들과 썰매를 지치다가 얼음구멍에라도 빠져 옷을 흠뻑 적시면 강가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이리저리 옷가지를 말려 집으로 들어오지만, 매캐한 연기냄새와 행색으로 사정을 금방 알아차린 어머니로부터 한참 꾸중 듣던 기억, 이제는 다시 할 수도 없지만 꾸중하실 어머니마저 아니 계시기에 가슴 저미는 아련한 그리움이며 가슴속에만 남아 있는 추억이다.  그러한 고향마을의 기억과 이웃과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을 '오장폭포의 겨울'로 이름하여 꽃 이야기로 대신한다.

            오장폭포의 겨울

열 아홉 구비를 돌아 숨가쁘게 내달린 산길에
숨결 같은 물 줄기를 내리던 깎아지른 절벽을
휘감아 안고 오르는 얼음 기둥 되어 마냥 하늘을 향하고 있네.
하염없이 올라도 하늘은 닿지 않고
문득 발아래 강물을 향해 투신하는 하얀 눈발들.

눈을 들어 바라보면 다시 시작되는 세상
길은 강물을 따라 종량리 마을을 지나 대기리로 이어져서
절망은 한갓 부질없는 기우였음을
눈 내리는 저녁 오장폭포에 와서 깨달았네.

한 줄기 강바람이 절벽을 타고 오르면
불현듯 가슴 속으로 밀려드는 그리운 이름들
바람이 달려가며 솔가지 끝을 스칠 때 부르고 있네.

다시 절벽아래로 사랑보다도 더 깊은 눈이 내리고
강물은 부드러운 손길로 오장폭포를 감싸
그곳에서 나의 그리움은 새롭게 시작되었다.
세상의 끝은 또 다른 사랑의 시작이었다고.

지금도 오장폭포에는 눈이 내리고 있네.
깎아 지른 절벽 아래로
사랑보다도 더 깊은 눈이 내리고 있네. (2002. 2. 4)

  삼라만상이 얼어 붙은 겨울에도 생명의 고동은 멈추지 않는다. 얼어붙은 폭포의 얼음기둥 안쪽에는 흐르는 물줄기를 타고 푸른 색조를 띤 이끼가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가고, 낙엽 쌓인 숲속에서는 노루발풀이 홀로 청청한 모습을 비치며, 호랑가시나무의 새빨간 열매와 멋지게 생긴 잎새는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한다.  그리고  날씨가 추워질수록 활력이 넘치는 겨우살이는 산비탈의 굴참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 신갈나무, 떡갈나무 등과  느릅나무에 까지 화려한 문양을 나타낸다.  그 문양은 변산 내소사의 대웅전의 문양 못지 않게 다양하고 정교한 모습을 그려내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산자락의 흰 눈을 배경으로 붉으스름한 나무줄기에 유난히 노란 색채를 드리운 박달나무 겨우살이는 삭막한 겨울산에 꽃을 피우는 겨울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겨울에도 푸르름은 매, 난, 국, 죽의 사군자에 든 것처럼 대나무의 곧은 기상에서, 기파랑의 넋이 깃든 잣나무 가지 끝에서도, 붉은 기둥을 곧추세워 휘늘어진 가지를 거느린 금강송의 여유자적한 모습에서도 맛볼 수 있다.  울진 불영계곡 근처 소광리의 소나무숲이나 대관령 자연휴양림에서 볼 수 있는 그 낙락장송의 거대한 기품은 얼어붙은 계곡의 빙벽과 조화되어 겨울만이 선사하는 진풍경을 보여준다. 그 푸르름의 열락은 이곳에도 있다. 동학농민운동의 발상지인 정주시 고부면에 위치한 두승산은 고부마을을 포근히 감싸면서 사방이 탁트인 평야지대에 자리하였기에 산은 높아 보이고 길도 제법 멀어 보인다.  온 산이 푸른 소나무로 덮여 산행 길에 들어서면 알싸한 솔 냄새가 정신을 맑게 가다듬어 주며, 발걸음은 푹신한 황토길 탓에 마냥 가볍기만 하다.  산길로 올라서면 키를 넘는 푸른 산죽자락이 곧고 길게 늘어서 이순간만큼은 겨울임을 잊게 한다. 그리고  온갖 산새들의 지저귐을 공으로 들으며, 산마루턱에 위치한 유선사에서 들려오는 나즈막한 풍경소리에 마음은 어느덧 성불사의 나그네가 된다.

            ‘성불사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소리 ….  끊일젠 들릴세라 소리나기 기다려져…’

그리하여 그 기다림은 곧 새봄으로 이어진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자연의 순리에 따라 이어지는 새봄의 생명들을…


6. 에필로그

  누가 시키지도, 누가 재촉한 것도 아닌데 시작을 하였고 그리고 서둘러 에피소드를 마무리합니다.  스스로 놓여나기 위해, 그리고 본연의 자리로 되돌아 오기 위해…  글을 쓴다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라고 늘 생각하였지만 이번에는 일탈하였습니다.  하지만 졸필임에도 성원을 주신 우리연구회원 여러분이 계셨기에 마무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내가 혼수로 장만해 온 캐논A1 필카의 작동불량으로 수리비 엄청 들이다가 마침내 몇 해전에 자동필카로 교환하였고, 자동필카로는 야생화 사진 찍기 곤란하여 작년 여름에 산 캐녹스V4 디카를 지난 12월에 나의 주말 빨래더미와 함께 세탁기에 투입하여 작살낸 후 하릴없이 사진대신 고향이야기와 함께 꽃이야기를 시작하였음을 고백합니다. 사실 오래전 부터, 이다음에 시간이 생기면 지난 30여년간 직접 경험했던 방방곡곡의 여행지 중에서 진수만을 골라 잘 꾸며진 여행안내서 하나 내야겠다는 생각, 그리고 최근 몇 년 전부터 우리들꽃과 접하면서 우리 꽃 하나 하나에 관한 모든 이야기들을 책으로 엮어내고 싶다는 소망을 가졌습니다.  언감생심, 언제일지도 모르지요.
  새해 들어서 휘트니스를 시작했습니다. 봄이 오면 회원여러분과 함께하는 탐사산행을 위해서. 그리고 주말이면 빠짐없이 아내와 동행하여 집 근처 산을 오릅니다. 청계산, 백운산, 수리산, 관악산, 모락산, 바라산...  어제는 백운산 골짜기를 오르며 신○균님의 발자국을 더듬어 보았습니다.  그러다보면 들꽃처럼 고운 우리연구회원님들을 만날 수 있겠지요.  [끝]

댓글목록

조경자님의 댓글

조경자 작성일

  순 서울산인 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축복을 받으신것 같아 샘을 내면서 재미있게 읽어 왔습니다. 좀 아쉽기도 합니다.잘 꾸며진 여행안내서 기다릴께요^^*

이양섭님의 댓글

이양섭 작성일

  경자님~~지두요~~ 초등일학년때 민들레꽃 이야기만 나오면 얼마나 주눅이 들었었는지.... 지금도 민들레 생각만하면 공포 !!! 대전에 와보니 길가에 널린게 민들레더라니까요 후훗

송정섭님의 댓글

송정섭 작성일

  그래서 어릴적 꿈과 추억이 중요하다고 하는 모양입니다. 평생 함께 하며 살아갈 수 있으니..., 좋은 글 쓰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사계를 마치셨으니 이제 다음 차례는 노루귀의 일생?, 원추리의 하루? ㅎㅎ~ 계속 기대하겠습니다.

이요조님의 댓글

이요조 작성일

  우러러뵙기 목이 아플 지경입니다. 대단하십니다. 부럽습니다.......한없이.

김은주님의 댓글

김은주 작성일

  김귀병님 감사하게 잘 읽었습니다. 어쩜 그렇게도 제 어린시절과 함께하셨는지...덕분에 추억속 하얀 실타래를 풀어보았습니다. 내외분 화목하시고 늘 건강하시여 좋은 곳 여행많이 하시고 예쁜이들 많이 구경하시고 언제 어디서나 행복하소서...

신흥균님의 댓글

신흥균 작성일

  바라산도 아시는걸 보면 분명히 그 동네는 김귀병님 동네가 맞습니다. 히~ 발자국 지우고 다니야지...김귀병님과 김은주님한테 못생긴 실물 보여 드리기가 민망스럽습니다. 너무 아름다운 글 가슴이 찡하게 읽고 또 읽었습니다.

이영주님의 댓글

이영주 작성일

  늘 좋은 글올려 주심에 감사드림니다.

허숙님의 댓글

허숙 작성일

  아는곳이 나올때마다 그 풍경 다시 떠 올리며 한폭의 수채화 같은 님의 글...    맑은 샘같은 글의 단맛에 폭 빠져 듭니다 . 책을 기대하며 담글을 기린목으로 기다립니다.^*^         

최명순님의 댓글

최명순 작성일

  정말 겨울의 운치와 따사로운 맛을 정을 느끼는 '참겨울'의 모습을 이곳서 선생님의 글에서 느낍니다. 감사함다.

윤영미님의 댓글

윤영미 작성일

  추억을 함께 공유할수 있다는건,행복이었읍니다.감사드립니다.

김정림님의 댓글

김정림 작성일

  제 어릴적 추억에 허적이며 글 감명깊게 읽었습니다.담 글 기대하며 두분 행복이 영원하십시요.

김귀병님의 댓글

김귀병 작성일

  주제를 넘는 바람에 여러님들께 송구합니다. 등단하신 요조님께는 황공할 따름입니다. ^^

홍기천님의 댓글

홍기천 작성일

  김귀병님의 글속에는 온화함과 아름다움과 또한 겸손의마음도 충만합니다.

황숙님의 댓글

황숙 작성일

  훗 ㅡㅡㅡ  꿈결인지...  잠결인지...    님의 글..  마음에는  잔잔함이...  봄날에 아지랭이 같은  보드라움이 있습니다  ^*^..  또, 뵈어요  ^^

이길영님의 댓글

이길영 작성일

  다른 분들이 쓴 글들을 읽으며 부러워도 하고 써보고 싶은 충동도 많이 느끼고는 하지요.김귀병님의 글을 읽으면서도 부럽고 샘이 나더군요.그러나 실제 글을 써보면 그게 함부로 시작할 일이 못된다는 점을 다시 새삼스럽게 느끼고는 하지요.짧은 문장으로 꼬리글을 다는 정도야 조금 길어지고 뒤죽박죽이 된들 별일이 아니지만 어떤 주제를 정하고서 써보려 하면 생각부터 막히더군요.대단하십니다.저도 올해에는 전국 다녔던 곳,가고픈데 못갔던 곳,그리고 이름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들과 산의 풀꽃을 실컨 보려 마음먹어 보는데 잘 되려는지...메모장을 가지고 다닐 생각이지만 결국 메모가 마음을 흐트러지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봅니다.좋은 글 계속해서 잘 보았습니다.감사합니다.